감상 랩걸 2017/11/23 23:56 by

처음에는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도넛’이라는 표현을 본 적 있다. 마음에 구멍이 뚫린 사람들, 특히 여자들. 나는 아무도 나에게 관심없는 게 디폴트라고 생각하는 종류의 사람이고, 그럴 필요가 없는 때에조차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을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 이해하지는 못한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증명으로 생각하고, 번번이 스스로에게 합격 혹은 불합격 딱지를 붙이는 사람들 말이다.   

쓸모없는 사람이 될까 두려운 나머지 워커홀릭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호프 자런이 실험실에 집착하는 모습은 정확히 그렇게 보였다. 실험실이 없다면 스스로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빌과의 관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명의 인간에게 이토록 정서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불건전하지 않나? 호프는 빌을 감정적으로 착취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어떤 존재에게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식물은 연약하고 수동적인 이미지이지만, 내가 읽은 모든 식물 서적의 저자들은 식물의 특징으로 아름다움보다는 강인함을 꼽았고, 그래서 사랑했다. 어떤 식물들은 환경에 순응하기보다 적극적으로 환경을 바꾼다. 비록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과학계는 정글이다. 승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실력만이 아니다. 실험실을 꾸린다는 것은 자금을 끌어와야 한다는 것이고, 쇼맨십과 정치력처럼 얼핏 과학자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호프는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낸 과학자다. 이 사실은 그녀가 나아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할 수 있는 것 뿐 아니라 잘하지 못하는 것에도. 

용기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두려우면서도 나아가는 것이다. 삶에서 용기만큼 의지가 되는 자질은 드문데, 과학자에게도 이는 물론 필수적인 자질이다. 나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연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버티는 용기 말이다. “나는 남의 말을 듣는 데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잘한다.”

   호프와 빌의 관계도 처음 생각한 것과 달랐다.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관계가 불건전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오래된 투자 격언은 감정적 투자에도 적용된다. 나의 오해는 이 관계가 감정적 착취라기보다는 상호적 호혜관계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다. 빌이 없었다면 호프가 버티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호프가 없었다면 빌은 틀림없이 못 버텼을 것이다. “물을 먹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이물에 앉아서 배가 나아갈 때 물을 맞는 사람 말이다. 호프는 물을 먹는 사람이고, 남의 말을 듣는 데 능숙하지 않고, 과학자이다.  

내가 호프 자런을 완전히 이해하는 날은 아마 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쓰는 모든 글은 어머니께 바치는 것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만, 나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남의 말을 듣는 데 능숙하지 않지만 과학자는 아니다. 내 손에는 아무 비밀도 없다.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앞으로 그렇게 될 일도 없을 것을 알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체념이 아니라, 그냥 특별하지 않은 존재로 사는 삶이 꽤 마음에 든다. 

이 책을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와 호프와의 차이만큼이나, 이 책과 나의 취향에는 비록 우호적일망정 여전히 거리가 있다. 하지만 어릴 때 읽었다면 나도 틀림없이 과학자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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