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일의 기쁨과 슬픔 2009/12/14 19:04 by




알랭 드 보통
이레




물류, 비스킷 공장, 직업상담소, 로켓과학, 그림, 송전공학, 회계, 발명, 항공산업. 알랭 드 보통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문장가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그가 어떤 범주로도 한데 묶기 힘들어 보이는 다양한 일터의 풍경을 읽고, 또 쓰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된 것은 화물선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방파제 끄트머리에서 방수 재킷에 창이 두툼한 장화로 완전무장하고 말없이 배를 응시하는 사람들. 그들이 추위를 무릅쓰는 것은 실용적 이유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그저 배 자체에 감탄할 뿐이다. 그냥 배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보통이 지적하듯, 이는 사람들이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그는 또한 화물선 관찰자들이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근대 이전 여행자들의 습관과 닮았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들은 현대 관광객들과 달리, 노동 현장에도 문화재나 공연장 만큼의 '볼 거리'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하려는 것은 결국 현대 일터의 스케치를 통해 18세기 도시 풍경화를 글로 재현하는 것이다. 현대인이 스스로의 코 앞에서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보는 것을 벗어나, 타인의 일터를 조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다.

보통은 아마 몰랐겠지만 이런 시도가 이미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국내에는 '랑겔한스섬의 오후'와 묶여서 출간된) '해뜨는 나라의 공장'에서 인체표본 공장, 결혼식장(결혼식 공장), 지우개 공장, 낙농공장, 의류공장(꼼므 데 가르송), CD 공장, 가발 공장을 경험하고, 해석하고, 기록했는데 그 방식이 꽤나 비슷하다.

개인적으로는 하루키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보통이 가끔 자신의 '의도'를 살짝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설교를 늘어놓는 반면 하루키는 적당한 거리 이상으로 결코 접근하지 않으며 건조함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역시 '역설'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들은 치를 떠는 하루키 특유의 스리슬쩍 유머를 덧입히기 때문에 부담을 주지는 않는다. 선정된 일터들 역시 하루키 쪽이 취향에 맞는다.

그래도 송전탑 평가회 부분은 무척 흥미로웠다. 아마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죽을 때까지 알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언이라는 스코틀랜드인은 말한다. 우리 문화가 새나 오래된 교회의 관찰은 공개적으로 권유하면서 철탑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것은 부당하다고. 분명 일리가 있다. 나 역시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철탑 따위는 자연과 문화재를 망치는 흉물로만 생각해 왔는데 듣고 보니 제법 그럴듯하다. 네덜란드의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풍차 역시 처음에는 경치를 망치는 흉물 취급밖에 받지 못했다고 한다.

보통과 이언은 던지니스에서 런던 동부 캐닝타운까지, 175여킬로미터에 걸쳐서 542개 송전탑이 서 있는 영국의 가장 중요한 송전선을, 차를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따라간다. 전기는 0.00058초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들에게는 이틀이 걸린다.
달 없는 밤이면 숲에 솟은 철탑 밑에서 개와 여우가 배를 깔고 누워 새들이 송전탑에 부딪혀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니, 이 쯤 되면 철탑 역시 자연의 일부 아니겠는가! 자연은 아닐지언정, 최소한 우리 삶의 일부인 것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재미있는 부분. 믿거나 말거나, 이언의 송전탑 여행 가이드북격인 세계 철탑 백과사전은 대한민국 출판사에서 나왔다고 한다.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나 혼자 뜨끔했던 부분. "그의 고풍스러운 예의, 운율 있는 영어, 트위드 양복은 오로지 근대 이전의 문학 작품을 매개로 영국과 접촉하는 사람의 경우가 아니면 이제 찾아보기 어려운 영국 애호의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