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나는 어떻게 건성 피부를 극복했나 2010/02/01 22:59 by

건성 피부로 살아가는 게 뭐, 늘 나쁘지는 않다. 사춘기 때도 여드름 고민이 없었다. 어지간히 힘 준 날 아니면 수정 화장할 필요 없고, 아무 펜슬라이너나 써도 번지지 않는다. 만일 아열대 기후라면 건성 피부인으로서 좋은 점만 있고 나쁜 점은 없을 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4계절이 있는 나라다. 요즘은 2계절로 바뀌고 있는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문제가 되는 건 딱 한 철, 겨울이다. 올해처럼 영하 20도니 어쩌니 흉흉한 추위에 건성인은 말 그대로 몸부림친다. 얼굴은 그나마 복합성에 가깝지만 몸은 지독한 건성이다. 가려워도 가려워도 어쩌면 절묘하게 손 안 닿는 곳만 가려운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며 무아지경으로 긁다 정신을 차려보니 피가 뚝뚝 떨어진 경험이 있는가? 없다면 건성인이라 부를 수 없다.

창피한 것도 큰 문제다. 공공장소에서는 최대한 조심한다.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긁는 것까지 통제하기는 어렵다. 아따맘마에서 아리가 엉덩이 긁는 걸 두고 동동이가 단무지 씹는 소리라며 흉보는 것에 울컥했다. 걔가 아리 동생이라서 다행이지 내 동생이면 범죄자가 되었을지 모른다. 동동이 말고 내가.

더 말해 무엇하랴, 정전기도 엄청나다. 남들 같으면 앗따거로 끝날 일에 스파크가 번쩍인다. 무시무시한 소리도 난다. 자동차 문을 열 때나 스웨터를 뒤집어쓸 때뿐 아니라 하다못해 책장 넘길 때도 조심해야 한다. 불 끄고 침대로 올라가 이불 밑으로 들어가다 요란하게 스파크가 튄 일이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보니 무슨 심령 영화 같아서 쬐끔 재밌었는데, 자려고 달려들던 우리 집 개가 혼비백산해 깨갱깨갱 문자 그대로 꽁지가 빠지게 달아났다.

타고난 걸 어쩌랴. 팔자를 고칠 수는 없으니 가려운 거라도 개선해보자. 나, 연구 많이 하고, 돈깨나 들였다. 좋다는 바디로션은 다 써봤는데 록시땅의 시어버터 울트라리치 바디크림이 제일 나았다. 하지만 너무 비싸. 그리고 한파가 밀어닥치면 그 걸로도 해결이 안 된다. 일 년 중 제일 추운 한 달 정도는 아예 시어버터 원액, 아니, 원덩어리를, 무슨 빵에 버터 바르듯 치덕치덕 처바르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위대한 발견들이 흔히 그렇듯, 돌파구는 우연히 찾아왔다. 건성 피부는 속까지 이어지는 걸까? 가을부터 봄까지, 가습기 없이는 못 잤다. 콘도로 놀러가며 가습기 싸간 풋풋한 대학 신입생, 그게 나다. 배낭에서 꺼내니까 다들 경악하더라. 그런데 가습기 청소가 너무 귀찮았다. 나는 신을 원망했다. 가습기 없이는 못 버티는 연약한 편도선을 주신 것까지는 너그러이 참는다. 하지만 매일 즐겁게 청소할 수 있는 부지런함을 주시거나, 아니면 청소 따위 무시할 수 있는 대범함을 주시지,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궁시렁궁시렁 매일 청소하는 나날은 뭐란 말인가?

가습기 없이는 잘 수 없는데 청소 안 하고는 틀 수 없으니 잠자는 시간이 점점 늦어졌다. 이러다 결국 밤새는 날이 올 것 같았다. 나는 고민했다. 집이 건조한 건 날씨 때문이기도 있지만 난방 탓도 있다. 난방을 끄면 가습기 없이도 잘 수 있지 않을까. 설마 얼어 죽진 않겠지. 나는 비장한 각오로 난방을 껐다. 그리고는 이불을 하나 더 가져왔다. 잤다. 얼어 죽지 않았다. 목도 멀쩡했다. 추운 거 싫어서 스키장도 안 가는 수족냉증의 소음인이 이불 두 채 만으로 겨울을 났다.

흥이 난 김에 샤워 온도도 낮췄다. 소음인답게 여름에도 아침 저녁으로 뜨거운 물을 뒤집어쓴다. 전에는 삶겨 죽을 것 같은 온도였는데 지금은 아니다. 샤워꼭지를 뜨거운 물 쪽으로 조금만 돌려놓고 후다닥 샤워한다. 뜨거운 물을 한도 없이 틀어대며 오래오래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일이 없어졌으니, 정신건강에도 좋고 뭐, 공과금도 조금은 줄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지금, 건성 피부가 꽤나 개선되었다. 지금 쓰는 건 세타필 크림인데, 전처럼 치덕치덕이 아니라 톡톡 바르는 걸로 충분하다.

잘 때 난방 끄기와 미지근한 샤워. 혹여 따라해 보려는 용자라면 장비부터 갖춰야 한다. 거위털 이불과 목욕가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날에는 그냥 차렵이불 두 채로는 부족하다. 거위털 이불을 안쪽에 덮는다. 영하 5도 정도로는 땀도 난다. 그렇지만 침대가 아니고 바닥에서 잔다면 말리고 싶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무섭다. 추위에 입 돌아간다는 얘기가 꼭 도시괴담만은 아니다. 더불어 아파트가 아니라 주택이라면 동파 위험이 있으니 조심 또 조심.

목욕가운도 꼭 필요하다. 미지근할망정 물을 계속 틀고 있으면 괜찮다. 하지만 물을 잠그고 물기를 닦는 그 짧은 순간이 너무 춥다. 손만 뻗으면 되는 곳에 목욕가운을 대령해 놓고 샤워꼭지를 잠그자마자 신속하게 입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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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달에 2010/02/01 23:06 #

    피가 나도록 긁는 건성은 아닙니다만 저도 건성이라 큰 관심을 갖고 읽었어요.
    저는 얼굴이 특히 심해서 코 옆 볼부분이 하얗게 읽어나거든요. 세타필, 구해서 발라볼까했는데 이렇게 확인해주시다니 세파필에 믿음이 가는데요!
  • 2010/02/02 21:06 #

    저도 볼이 그래요. 얼굴이 짝짝이인지 오른쪽만-_-;;;
    세타필도 세타필이지만, 얼굴에는 시어버터 추천입니다. 얼굴 전체에 바르는 건 부담스럽고, 문제가 되는 부위에만 가끔 사용하는 데 효과가 너무 즉각적이어서 무서울 정도입니다. 쪼잔하게 딴 거 섞은 거 말고, 순수 시어버터 덩어리를 쬐끔만 덜어 손등에서 녹인 후 치덕치덕 바르고 자면 됩니다.
  • F모C™ 2010/02/01 23:18 #

    그냥 가습기 끼고 살고있습니다, 건성은 아닌데 목안만 건조하다보니=3=;;;
    난방 끄자니 안방에서 기겁할거고 아 그전에 침대도 없구만요 기각기각orz 게다가 방에는 우풍도 좀 있고 생각해보니 할 수가 없잖아아아아아앗orz 주택살때는 가습기가 필요없었는데 말입쥬 쳇쳇;ㅁ;
    청소는 뭐.. 요즘 나온거는 그나마 좀 쉬운가 싶은데, 그래도 물통 모양이 애매해서 건너편까지는 손이 안가고, 세제 써도 안되니 이건 소다라도 넣어서 흔들어줘야하는거냐고요오오오오오오!!!!!!!
  • F모C™ 2010/02/02 15:12 #

    덧붙이자면 아무 펜슬라이너 써도 번지지 않는다고 자랑하셨다가..
    마스카라 안번진다고 자랑했더니 바로 번지기 시작한 제 꼴이 되시려고 그러십니까( '')a
  • 2010/02/02 21:11 #

    가습기 쓰려면 그냥 무신경한 게 최고인 것 같아-_-;;;;
    가습기 메이트 하나 넣어주고 모든 게 다 해결된 듯 안심하는 자세.
    매일 죽어라 닦아도 결국 물때는 어쩔 수 없던걸.
    락스 들이붓고 싶은 거 참느라고 혼났네.
  • 2010/02/02 21:12 #

    악! 아무리 먹어도 배 안나온다고 자랑했다 벌받은 과거가 떠올랐어.
    그 때 그 입을 꿰매주고 싶다고 울부짖었는데 벌써 까먹다니;;;;
  • 사헤라 2010/02/01 23:54 #

    가습기가 왜 있나 했는데 이런분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군요ㅠㅠ;;;
    건성이라 좋은 점은 참 좋은데 나쁘면 진짜 나쁘고... 전 중,고딩때 얼굴에 각질이 하얗게 일어나고(진짜 대박으로) 손등에도 나서 진짜 겨울만 되면 할머니 손등이 되서 평생 안 고쳐질줄 알았는데 나이 먹으면서 싹 사라지고 아토피도 사라져서 뭔가 시간이 약이로구나 하는 맘이 생기더라구요.
    간지러움도 참 공감가는게 무릎뒤쪽이랑 팔접히는데랑 목 주름 몇줄 생기도록 긁고 피나면 좀 괜찮다가 딱지생기면 못 참아서 계속 피나는 인생살이고 피부가 약해져서 약쓰면 더 위험하고;; 참 생각하면 어떻게 살았나 싶어요..
  • 2010/02/02 21:14 #

    가습기의 필요성을 모르고 사셨다니 축복받으신 겁니다.
    건성도 개선되고 아토피도 사라졌다니 전생에 덕을 많이 쌓으셨나 봅니다.

    가려운 것처럼 심한 고문은 드물죠. 긁으면 더 가려운 걸 뻔히 알면서도 순간의 쾌락 때문에 멈출 수 없는 그 고뇌ㅠ_ㅠ
  • bluexmas 2010/02/02 00:22 #

    저도 피부가 건조한데, 샤워를 너무 뜨겁게 하면 아무래도 안되겠네요. 나이 먹고는 부지런히 신경써서 이제 몸은 괜찮은데 손발, 특히 발바닥은 정말 괴물발입니다. 다른 사람 등긁개로 쓸 수 있을만큼 거칠죠;;;
  • 2010/02/02 21:17 #

    달에님께도 추천했지만 시어버터가 답입니다.
    저 역시 발바닥이 강판 같아서 스타킹 여러 켤레 해먹었는데 구원받았어요.

    자기 직전 발 씻고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처덕처덕 바릅니다. 바로 양말 신고 잡니다. 늦어도 일 주일이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우툴두툴이 문제가 아니라 갈라져서 안이 들여다보이는 호러블한;;;; 피부도 붙여 줍니다-_-;;;; 이 쯤 되면 크림인지 본드인지.
  • assuming 2010/02/02 08:11 #

    저는 건성에 아토피인데도 여드름이 나는 민감성 피부에요 ㅜㅜ 저도 피부 좋아지고 싶어요 ㅜㅜㅜㅜ 흑흑
  • 2010/02/02 21:18 #

    어머 어떡해요 ㅠ_ㅠ
    스트레스성 여드름 아닐까요? 만병의 근원은 뭐니뭐니해도 스트레스더군요.
  • 아리스타 2010/02/02 10:44 #

    저도 건성인데 얼굴은 많이 좋아졌는데 몸은 진짜..저도 팔꿈치는 겨울에 피 날정도로 자다가 벅벅 긁어요.

    발바닥도 논같이 갈라지고...어떤 풋크림도 잘 안 듣더라구요.

    누가 <반질>이란 약국용 크림이 좋다고 해서 바르고서는 그나마 요즘은 괜챦아요 ㅠ.ㅠ
  • 2010/02/02 21:19 #

    반질^^;;; 이름 참 직관적이네요.
    위의 사헤라님께서 시간이 약이었다네요. 아리스타님도 그럴 지 누가 압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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