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다른 힘, 그리고 산만함. 최악의 조합치곤 사고가 드물다. 자해성 사고는 뻔질나게 저지른다. 하루도 빠짐없이 넘어지고 부딪히고 베이고 까지지만, 물건 하난 오래 쓴다. 곱게 쓰진 못한다. 노트북 사온 당일 뚜껑 끝에서 끝까지 멋지게 긁어 주었지만 5년이나 멀쩡히 썼고, 설거지하다 툭하면 미끄덩이지만 박살나는 건 열 개에 0.5개 정도다. 한낱 무생물일지언정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알아서 몸조심을 한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처음 독립하는 살림은 대부분 집에서 훔쳐온 물건들로 구비했다. 집구석에서 일없이 굴러다니던 것들은 십중팔구 사은품, 취향 나부랭이가 존중될 게재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처음 사는 살림에 뭐가 좋고 뭐가 나쁜 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접시들도 대부분 낱장짜리다. 홈쇼핑에서 꽃무늬 52피스, 이딴 거 안 산 걸 기쁘게 생각한다.
통오중 스텐 냄비를 처음 사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코팅 벗겨질 염려 없이 숟갈로 벅벅 긁고, 두툼하니까 저수분 요리도 되고. 열광해서 무지막지하게 돌리다 결국 태워먹었다. 삼발이 깔고 단호박을 통째로 찌면서 영화를 보았다. 한동안 정신을 팔다가 냄새에 뛰쳐갔다. 늦었다. 문제의 영화는 ‘거친 녀석들’이었다. 덕분에 주연 존 트라볼타는 냄비 태운 놈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이후 단호박에도 어쩐지 손이 안 간다.
베이킹소다를 있는 대로 들이부어 손목이 뽀샤지게 닦았더니 그럭저럭 쓸만해졌지만 비주얼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애용하다보니 슬슬 다른 크기가 갖고 싶어졌다. 문제는 이 녀석을 50% 할인가에 샀다는 것이다. 한 번 세일 맛을 봤으니 정가는 물론 30%나 40%도 성에 안 찬다. 무조건 반값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업체가 백화점에 입점하며 반값 세일을 관두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포기하고 다른 걸 사야하나 2년 간 고민하던 어느 날, 세일을 관두기로 한 걸 관두기로 했다는 문자가 왔다.
한 개를 반값으로가 아니라 두 개를 하나 값으로 사는 게 세일의 도리다. 16편수 냄비를 일찌감치 고른 후, 나머지 하나를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6.1리터짜리 24양수냄비를 살 것인가 아니면 4리터짜리 24웍을 살 것인가. 거의 사흘 간 다른 생각을 못할 정도로 고민한 끝에 전자로 정했다. 웍은 실리콘 손잡이 때문에 오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격이 비슷한데 기왕이면 큰 걸 사자는 심리도 꽤나 작용했다.
근데 주문 직전, 3.6리터짜리 20양수냄비를 사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숫자를 들여다보고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기세였다. 이럴 때는 직관에 맡겨야 한다. 차이를 몸으로 느끼는 게 최고다. 이미 있는 8.6리터 냄비를 가져와 6.1리터의 물을 부었다. 그런데 가득 찬다. 뭐지? 뭐긴 뭐가 뭐냐! 기존 냄비가 8.6리터가 아니라 6.1리터의 24양수 냄비였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바보도 드물다. 뜬금없이 20양수가 물망에 오르지 않았으면 똑같은 냄비 두 개 살 뻔했다.







덧글
이것저것 볶아보니 참 이래서 주방용품의 매력에 빠져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어요.
새 냄비가 참 이쁘네요. :)
담에 조카한테 갚으면 된다능!
동일한 크기의 냄비를 사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네요.
제가 원래,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얘길 열 마디 백 마디로 하는 걸 좋아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요 ㅠ_ㅠ
그런 저한테 깨달음을 준 게, '아끼다 똥 된다'는 명언!
방치하면 할수록 점점 유행에 뒤쳐진다, 뭐 이런 취지로 슬슬 꼬시면 어떨까요?
어머니들이 딸들보다 오히려 더 유행에 민감하더라구요.
친구분들 사이에서 뭐 하나 유행한다 싶으면 어느새 다들;;;
마법사의 제자가 생각나네요. 빗자루들이 알아서 청소를 하던......
전 상당히 오랫 동안 마법사의 제자가 디즈니 오리지널인 줄 알았답니다-_-;;;;
더욱 어이없는 건 정작 환타지아는 보지도 않았다는 사실;;;;
그냥 예고편만 본 거 갖고 그런 가당찮은 착각을 ㅠ_ㅠ
죄송합니다, 괴테님.
그치만 그 분께도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이미지에 안 맞게 그런 귀여운 시를 쓰다니;;;;
(다시 한 번 죄송한 건, 괴테 작품 중 제대로 본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다인데, 그나마 보면서 졸았다능;;;
두부 한 모 간장 한 병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_-;;;;
오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일전의 안데르센 깐 책 다다음 챕터가 오즈거든요.
바움은 안 모 씨처럼 찌질이는 아닌데 나름대로 꽤 웃기다능;;;;
나중에 포스팅할게요.
냄비 이뿝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일부러 물어봐 주시고, 감사합니다.
소독이래봤자 식초물에 팔팔 끓인 것 정도지만요^^;;;
웍의 첫 요리는 토마토 계란 볶음! 작은 냄비는 아직이에요.
심심할 때 놀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