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위기였다 2010/07/12 22:11 by

남다른 힘, 그리고 산만함. 최악의 조합치곤 사고가 드물다. 자해성 사고는 뻔질나게 저지른다. 하루도 빠짐없이 넘어지고 부딪히고 베이고 까지지만, 물건 하난 오래 쓴다. 곱게 쓰진 못한다. 노트북 사온 당일 뚜껑 끝에서 끝까지 멋지게 긁어 주었지만 5년이나 멀쩡히 썼고, 설거지하다 툭하면 미끄덩이지만 박살나는 건 열 개에 0.5개 정도다. 한낱 무생물일지언정 위기의식을 느낀 나머지 알아서 몸조심을 한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다.

근데 얘들도 사람처럼, 물정 모르는 녀석이 있다.

내가 그런 거 아니다. 손잡이가 혼자서 똑 떨어졌다. 조립 없이 용접한 모양이다. 내 힘으로 고칠 방법은 없다. 한편 빨간 냄비는 코팅을 태워 먹었다. 약간 벗겨진 걸 계란 삶기 전용으로 돌리다 결국 수명을 다 한 것이다.

뚜껑을 바꿔치기했더니 그럭저럭 들어맞는다. 이제부터 아래쪽 한 쌍에게 계란 삶기의 과업을 떠맡기기로 했다. 불쌍하지만 위쪽 커플은 퇴출이다.

처음 독립하는 살림은 대부분 집에서 훔쳐온 물건들로 구비했다. 집구석에서 일없이 굴러다니던 것들은 십중팔구 사은품, 취향 나부랭이가 존중될 게재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이다. 처음 사는 살림에 뭐가 좋고 뭐가 나쁜 지 무슨 수로 안단 말인가. 접시들도 대부분 낱장짜리다. 홈쇼핑에서 꽃무늬 52피스, 이딴 거 안 산 걸 기쁘게 생각한다.

통오중 스텐 냄비를 처음 사고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코팅 벗겨질 염려 없이 숟갈로 벅벅 긁고, 두툼하니까 저수분 요리도 되고. 열광해서 무지막지하게 돌리다 결국 태워먹었다. 삼발이 깔고 단호박을 통째로 찌면서 영화를 보았다. 한동안 정신을 팔다가 냄새에 뛰쳐갔다. 늦었다. 문제의 영화는 ‘거친 녀석들’이었다. 덕분에 주연 존 트라볼타는 냄비 태운 놈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이후 단호박에도 어쩐지 손이 안 간다.

베이킹소다를 있는 대로 들이부어 손목이 뽀샤지게 닦았더니 그럭저럭 쓸만해졌지만 비주얼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애용하다보니 슬슬 다른 크기가 갖고 싶어졌다. 문제는 이 녀석을 50% 할인가에 샀다는 것이다. 한 번 세일 맛을 봤으니 정가는 물론 30%나 40%도 성에 안 찬다. 무조건 반값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업체가 백화점에 입점하며 반값 세일을 관두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포기하고 다른 걸 사야하나 2년 간 고민하던 어느 날, 세일을 관두기로 한 걸 관두기로 했다는 문자가 왔다.

한 개를 반값으로가 아니라 두 개를 하나 값으로 사는 게 세일의 도리다. 16편수 냄비를 일찌감치 고른 후, 나머지 하나를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6.1리터짜리 24양수냄비를 살 것인가 아니면 4리터짜리 24웍을 살 것인가. 거의 사흘 간 다른 생각을 못할 정도로 고민한 끝에 전자로 정했다. 웍은 실리콘 손잡이 때문에 오븐에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격이 비슷한데 기왕이면 큰 걸 사자는 심리도 꽤나 작용했다.

근데 주문 직전, 3.6리터짜리 20양수냄비를 사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숫자를 들여다보고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올 기세였다. 이럴 때는 직관에 맡겨야 한다. 차이를 몸으로 느끼는 게 최고다. 이미 있는 8.6리터 냄비를 가져와 6.1리터의 물을 부었다. 그런데 가득 찬다. 뭐지? 뭐긴 뭐가 뭐냐! 기존 냄비가 8.6리터가 아니라 6.1리터의 24양수 냄비였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바보도 드물다. 뜬금없이 20양수가 물망에 오르지 않았으면 똑같은 냄비 두 개 살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지른 16편수 냄비와 24웍.
쓸데없는 고민이 도움이 된 드문 사례는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지어졌다. 안 그래도 고민이 취미생활인 인생이다. 뭐 하나 사려면 유체이탈 직전까지 고민하는 버릇이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나! 사기로 마음먹음과 동시에 결제 버튼을 누르는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는데 앞으로는 쬐끔 덜 부러워해야겠다.

바보라서 싫다. 그래도 게으른 바보라서 다행이다.


덧글

  • 강우 2010/07/12 23:01 #

    코팅 다 벗겨진 프라이팬과 작별을 고하고, 이모네서 강탈이라 쓰고 얻어왔다고 읽는 새 팬을 가져와서
    이것저것 볶아보니 참 이래서 주방용품의 매력에 빠져드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었어요.
    새 냄비가 참 이쁘네요. :)
  • 2010/07/13 22:21 #

    원래 싱글 라이프는 강탈 및 구걸;;;에 기초해서 시작하는 것이지요-_-;;;;
    담에 조카한테 갚으면 된다능!
  • Fiancee 2010/07/13 04:10 #

    그... 그러니까 결론은 새 냄비들을 사셨다는 거고, 그 새 냄비들을 자랑하시고 싶으신 거죠? ^^
    동일한 크기의 냄비를 사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네요.
  • 2010/07/13 22:22 #

    그, 그쵸, 그것이 핵심!
    제가 원래,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얘길 열 마디 백 마디로 하는 걸 좋아합니다.
    자랑은 아니지만요 ㅠ_ㅠ
  • 하니픽 2010/07/13 10:22 #

    저희집은 냄비와 후라이팬 모두 오래되서 세트로 큰맘 먹고 샀는데 어머님께서 아깝다고 개시를 안하시고 벌써 반년간 방치하고 계세요 ㅠ_ㅠ 사도 아깝다고 안쓰시니 가끔 왜 사셔서 제 방에 창고마냥 쌓아놓으신건지 의문이라니까요 ㅠ_ㅠ 저도 좀 예쁜 냄비와 후라이팬을 쓰고 싶은데 그렇다고 부엌의 절대 권력자 어머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입만 삐죽대고 있답니다 ㅠ_ㅠ
  • 2010/07/13 22:24 #

    저도 실은 기껏 산 걸 모셔두고 고사 지내는 편이었거든요.
    그런 저한테 깨달음을 준 게, '아끼다 똥 된다'는 명언!

    방치하면 할수록 점점 유행에 뒤쳐진다, 뭐 이런 취지로 슬슬 꼬시면 어떨까요?
    어머니들이 딸들보다 오히려 더 유행에 민감하더라구요.
    친구분들 사이에서 뭐 하나 유행한다 싶으면 어느새 다들;;;
  • 당고 2010/07/13 10:23 #

    주방도구들이 알아서 몸조심을 한다니 ㅋㅋㅋ
    마법사의 제자가 생각나네요. 빗자루들이 알아서 청소를 하던......
  • 2010/07/13 22:28 #

    이 시점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전 상당히 오랫 동안 마법사의 제자가 디즈니 오리지널인 줄 알았답니다-_-;;;;
    더욱 어이없는 건 정작 환타지아는 보지도 않았다는 사실;;;;
    그냥 예고편만 본 거 갖고 그런 가당찮은 착각을 ㅠ_ㅠ

    죄송합니다, 괴테님.
    그치만 그 분께도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이미지에 안 맞게 그런 귀여운 시를 쓰다니;;;;

    (다시 한 번 죄송한 건, 괴테 작품 중 제대로 본 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다인데, 그나마 보면서 졸았다능;;;
  • 설화석고 2010/07/14 15:18 #

    냄비는 그렇다치고 저 별 장화 신고 뒷꿈치 꾹꾹 세번 치면 캔자스 가나요? 캔자스에 가면 뭘 먹고 오나요.
  • 2010/07/14 21:43 #

    캔자스라니...그렇게 척박한 곳에 어찌 가겠습니까.
    두부 한 모 간장 한 병 구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_-;;;;

    오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일전의 안데르센 깐 책 다다음 챕터가 오즈거든요.
    바움은 안 모 씨처럼 찌질이는 아닌데 나름대로 꽤 웃기다능;;;;
    나중에 포스팅할게요.
  • googler 2010/07/14 18:35 #

    프님, 지난번 말씀하신 그 딸기잼에 같이 곁드는 어떤 음식이 있는 거 있잖아요? 그거, 따로 어떤 음식이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 그냥 쨈 종류랑 그렇게 곁드는 게 이나라 사람들이 좋아한다네요. 블루벨리잼이랑도 같이 곁들고 또 딸기잼 오렌지땜이랑도 같이 곁들어내고 그런다네요. 따로 그런 음식이 지정돼있는 게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

    냄비 이뿝니다.
  • 2010/07/14 21:44 #

    우앙, 그런 거였군요.
    번거로우실 텐데 일부러 물어봐 주시고, 감사합니다.

  • tanpo 2010/07/17 02:32 #

    ㅎㅎ 같은 것 안 산 것이 게으름 덕분이었군요. 반짝거리는 냄비들 어여 사용하고 싶으시겠어요~
  • 2010/07/18 22:26 #

    역시 게을러서 새 냄비 소독을 미루고 미루다 몇 주나 지나서야 개시했어요.
    소독이래봤자 식초물에 팔팔 끓인 것 정도지만요^^;;;

    웍의 첫 요리는 토마토 계란 볶음! 작은 냄비는 아직이에요.
  • myopinion 2010/07/27 23:39 #

    처음와봤는데.. 글잘쓰시네요.
  • 2010/07/28 20:41 #

    감사합니다 >_<
    심심할 때 놀러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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