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누가 뭐래도 소설은 이야기다 2011/01/04 19:09 by


설계자들
김언수
문학동네





찾았다, 재미있는 소설. 말발 혹은 이미지(a.k.a. 감수성)에 의존하는 대신 이야기로 승부하는 소설이 한국에도 있었다.

김언수의 캐비닛이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읽지 않았다. 작위적 설정 때문이었다. 그 자체가 싫다는 게 아니다. 그것에 매달리다 감당 못해 허우적대는 경우가 너무 많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든 게 다행이다. 정보가 있었다면 읽지 않았을 것이다.

래생(來生)이라는 오그라드는 이름의, 암살자라는 오그라드는 직업을 가진 사내가, 파렴치한 전직 장군으로 지금은 큰 개와 산속에서 지내는 노인을 향해 총을 겨누는 오그라드는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소제목들도 죽여준다. '아킬레우스의 뒤꿈치', '캔맥주를 마시다', '개구리가, 개구리를, 잡아먹는다', '뜨개질하다'.

구구절절 사무치는 중2 인터넷 소설성은 과연 노린 것인가 아니면 우연인가는 다 읽은 지금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재미있다. 오그라들던 손가락이 도로 펴져 책장을 계속 넘기게 된다.

이 소설의 결함을 깨달은 것은 이미 책장을 덮은 후에서다. 등장인물들이 한결같이 평면적이다. 이 치명적 사실을 그렇게나 늦게 안 것은, 이 작위적인 설정 하에서 오히려 그것이 효과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화려하고 비현실적인 인형 극장에서, 정교하게 움직이는 인형들이 된 것이다. 심술궂은 의문이 생긴다. 이 작가는 과연, 지극히 현실적인 설정에서 가장 평범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한다면 격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단지, 궁금한 것이다. 그가 타고난 재능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왜냐하면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만은 하늘이 주는 것이고 죽도록 노력해도 얻을 수 없다는 게 나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덧글

  • 당고 2011/01/04 19:37 #

    후후- 저도 읽으려고 둔 소설인데 언제 읽을지는; 지금도 읽을 책이 너무 쌓여서;
    저도 이야기로서의 소설이 제일 좋아요! 제일!
  • 2011/01/05 17:01 #

    쌓인 책이 많다면 올해도 책책책은 순조롭게 계속되는 거군요!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시시껄렁한 일상을 밋밋하게 쓴 소설이에요.
    이렇게 발랄한 설정을 딱히 선호하진 않는데,
    이야기에 홀려버렸어요.
  • 여름아이 2011/01/04 19:40 #

    <캐비넷> 정말 잼있게 읽었어요. 요것도 봐야겠다!
  • 2011/01/05 17:02 #

    저도 캐비넷 볼 건데 쬐끔 걱정됩니다.
    보통은 후속작이 더 발전하잖아요.
    데뷔작만 찬란하게 내어놓고 사라지는 작가들이 물론 많지만,
    이분은 그 경우는 아닌 것 같고요^^
  • 카이º 2011/01/04 20:08 #

    포스팅 제목부터 절절히 와 닿아요..

    소설은 정말 말 그대로 이야기..
    잘 풀어나가고 글로써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생각하게끔 해야지요..

    국내소설에도 좋은 작품이 꽤 많군요
    기대됩니다^^
  • 2011/01/05 17:03 #

    사실 국내소설은 별로 안 보았어요.
    이야기 선호파라서요^^
    주로 본 게, 교과서에 나오는 작가들;;; 그것도 요즘 교과서 말고 옛날 교과서.
    그러니까 김동인이라든가 이광수라든가;;;;;

    작년부터 조금씩 보고 있는데, 좀 더 진출해 보려고요 >_<
  • 2011/01/04 20:44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01/06 20:38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_<

    정말 작위적인 소설이죠?
    '소설을 소설처럼 써야 한다는 강박', 이 말씀도 동감합니다^^
    근데 저는, 이야기 따위 개나 줘인 소설에 진절머리를 내는 입장이어서요^^;;;;
    덕분에 상대적으로, 비밀글님이 힘드셨던 부분이 불편하지 않았답니다.

    제 취향을 쬐끔 더 설명하자면
    한국 소설뿐 아니라 현대 소설보다는 오히려 19세기 소설에 열광한답니다.

    따지자면 '설계자들'은 정교한(=작위적인) 구성과 발랄한(!) 설정이, 제가 좋아하는 19세기성과는 오히려 반대죠.
    그치만 이 소설을 좋게 말하는 건, 말 그대로 이야기여서인 듯 해요.
    당장 저녁 끼닛거리 걱정하는 처지인 사람들로 하여금 떠돌이 이야깃꾼에게 동전 한 푼을 던지게 만드는 종류의 힘이 이 책에는 있습니다.

    반대로 제가 정말 싫어하는 작가가 조이스 캐럴 오츠인데요.
    이 사람 역시, 정교한 설정을 바탕으로 인형극장 같은 글을 씁니다.
    정말 완벽한 구성과 문체인데.... 이사람에 대해 저는 비밀글님의 덧글과 유사한 평을 했어요.
    단지 소설을 쓰기 위해,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어냈다고.

    김언수와 오츠의 차이를 만드는 게 뭔지 묻는다면, 솔직히 할 말이 없습니다;;;;
    하늘이 내렸다니 뭐니 하는 얘기를 그래서 끌어들였나봐요.

  • 정메롱 2011/01/04 21:54 #

    설계자들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재미있었어요 래생보고싶네요ㅋ
  • 2011/01/06 20:39 #

    메롱님이 좋아하는 ㅎ씨가 래생 하면 어울리겠네요.

    저도 이거 보고 나서 영화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쫌 있으니,
    아 그러면 너무 평범해질 거야, 라고 생각.

    근데 쫌 더 있으니까,
    잠깐, 소설이 평범하지 않은 게 어떤 점에서였지?

    ;;;;;;
    뭡니까 이 소설 요사스럽기도 하지.
  • AilinLusse 2011/01/04 22:54 #

    마지막 줄이 참 가슴에 와닿네요... 정말로 그 재능은 하늘이 내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에요;
  • 2011/01/06 20:45 #

    머리보다는 엉덩이!
    어지간한 재능보다는 노력이 백 배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그치만 진짜, 재능만이 모든 걸 말해주는 분야가 있지요 ㅠ_ㅠ
    천재는 학문 말고 예술을 해야 한다는 게 저의 지론.
  • SvaraDeva 2011/01/05 12:45 #

    이런 소설을 좋아하시는군요!
    그죠 이야기꾼 뿐만이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끌고 흔드는 모든 일은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아요.
  • 2011/01/06 20:47 #

    넵, 이야기 말고 다른 것들도 그렇죠.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과연 무엇인가는 결코 규명될 수 없는 문제잖아요^^;;;
    아니, 내 마음도 내가 모르겠는데 남이 어찌 제 마음을 알며, 제가 어찌 남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전 이런 소설이 좋아요.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잡아채서 풀어내는 소설이요.
  • second 2011/01/06 01:34 #

    캐비닛을 재미있게 봐서 설계자들도 기대하고 읽었는데 흡족했었어요. 다들 설정이 있는 작품이라 결말이 조금 걱정되고 우려하던 결말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게 하는 흡입력만큼은 대단한 것 같아요. 설정도 기발하고요. 재밌게 읽었던 책 리뷰를 보니 반갑네요.
  • 2011/01/06 20:49 #

    저도 캐비닛 보려구요.
    설정 보고 경악해서 안 보았었거든요^^;;;;

    저의 과민반응은, 설정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드는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것에 기인합니다;;;
    개인적으로 그런 걸 '제국력' 소설이라고 불러요.
    왜, '제국력 4325년 인류는 모든 희망을 잃었다...' 요런 식으로 시작되는 인터넷 소설들 있잖아요^^;;;
  • watermoon 2011/01/06 15:14 #

    이야기꾼은 하늘에서 내린다는 점에 동감 1000%입니다.
    그런사람들은 전생에도 이야기꾼이였고
    다음 생에도 이야기꾼일것 같아요.

    저도 무지무지 재밌는 이야기가 읽고 싶은데
    아직 도서관개척을 못했어요.
    1년간 도서관 끊고 공부만 하려는데 어찌될지 모르겠습니다
  • 2011/01/06 21:00 #

    제가 인정 못 하는 소설가들은 아마 글로 써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지 모닥불 둘러싸고 이야기하는 거였으면 벌써 궁둥이를 채여서 내쫓겼을 것이다...라고 혼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을 굳이 끊을 필요 있을까요?
    1년 내내 공부만 한다는 건 너무 슬퍼요 ㅠ_ㅠ
    인간의 집중력이란 의외로(?) 취약해서 끊어지기 전에 놓아주면서 놀망놀망 해야 한다능!
    그런 식으로 공부하는 건 세상의 온갖 재밌고 쓸데없는 일에 물들기 전인 10대 때나 가능한 거 아닌가염?
  • 정메롱 2011/01/07 00:01 #

    ㅎ씨는 래생이되기에는 너무 대놓고 ㅅㅅ하십니다ㅋㅋㅋ

    전 이 작품 결말이 많이 아쉬웠어요 뭔가 진짜 재밌어질것같은데 끝나버린듯..설계자들에 대해서 더 알고싶었는데ㅎ
  • 2011/01/08 21:46 #

    어맛,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저랑 메롱님이 남자 하나 두고 머리 끄뎅이 붙잡는 일은 없겠습니다 ㅋㅋㅋ

    그치만 메롱님 견해에 동조하는 분들이 많다는 건 인정합니다.
    책에서도 곱창집 아줌마를 필두로 래생 허우대를 칭송하는 여인네들이 좀 나오지 않던가요?

    결말이 아쉽다는 건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아요.
    따지자면 설계자들에 대한 게 가장 매혹적인 부분인데, 고 부분은 스샤삭 넘어간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요.
    전 래생을 구하는 미토의 설계가 참 궁금했거든요.
    무슨 묘수일까 두근두근했는데 별 거 아니었는 데다가 대충만 언급해서 좀 실망했어요.
  • 2011/01/07 22:45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1/01/08 21:49 #

    흑흑 가고 싶지만 경기북도민으로는 너무 먼 거리 ㅠ_ㅠ
    그래도 감사합니다.

    캐비넷 베스트셀러인 거 같더라구요.
    저처럼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사람들은 문제인 게, 베스트셀러들은 더럽거든요 -_-
    거기다 경쟁도 치열하고 ㅠ_ㅠ
    뭐, 지금쯤은 별로 안 치열할 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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