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 피아니스트의 손 2012/06/18 19:00 by

원래는 갈 생각이 아니었다. 그들이 오는지 몰랐고, 혹시 알았어도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음악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좋아한다. 하지만 그밖에도 좋은 게 많다. 무심코 듣다가, 특별한 이유 없이 안 듣게 되었고, 그러다 다시 듣는다.

음악 없이 산 짧지 않은 기간,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음악 세계도 변했다. 클래식 음악에서 인기곡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인기 연주자들은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바뀌었다. 내가 좋아하던 연주자들은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노쇠해서 예전 같지 않다.

타로와 트로티농의 피아노 듀오 콘서트에 대해 처음 안 건 S님의 트윗을 통해서다. 그것도 우리 동네에 온단다. 경기북도에 살다보니 공연 보기가 쉽지 않다. 내가 무슨 음악 애호가라고, 3호선 끝에서 끝까지 예술의 전당으로 갔다가 다시 끝에서 끝으로 돌아올 마음을 먹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동네라니, 솔깃했지만 놀다 보니 까먹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T님까지 들썩이는 것 아닌가. 나도 갈까? 그치만 또 까먹었는데, 소셜 커머스에 반값으로 풀렸다. 이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나 보다.

내가 아무리 게을러도 그렇지 이쯤 되면 무거운 엉덩이를 들썩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시락 싸서 출동했다. 단백질바, 건포도, 포테이토칩. 카페에서 일하다 표 받아오고, 도시락 까먹고, 쬐끔 더 일하다 10분 전에 입장.

알렉상드르 타로는 클래식 피아니스트고 뱁티스트 트로티농은 재즈 피아니스트다. 내가 알고 간 건 이게 전부다. 그들이 지금까지 어떤 길을 걸었는지는 물론, 이번에 무슨 곡을 연주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엇갈리게 겹쳐 둔 피아노들을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등장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고, 두 쌍의 손이 건반 위에 얹히고, 음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이거 알아.

예고를 다니다 보니 매주 음악회가 열렸다. 피아노 두 대를 동시에 연주하는 것을 그 때 처음 보았다. 그랜드피아노 두 대를 동시에 두드리는 모습을 코앞에서 보는 건 제법 박력 있는 경험이다. 바르토크의 미크로코스모스 듀오. 피아노 듀오 곡은 많지 않다. 고등학교 때 들은 듀오에는 이 곡이 틀림없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오래된 기억이 구체적으로 재현된 것은 아니다. 내가 기억해낸 것은 바로토크의 추상적 이미지다.

벨라 바르토크는 1881년 출생해 1945년 사망했다. 그는 초창기 현대음악을 이끈 작곡가들 중 한 명이다. 현대 대중의 취향은 언제나 비현대 음악에 머문다는 것은 20세기 이후 클래식 음악의 가장 깊은 슬픔이다. 하지만 바로토크는 난해하지 않다. 분명 불편하지만, 묘하게 끌린다. 어쩌면 그것은 헝가리 전통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다.

현대 음악은 기존 음악의 무엇을 파괴했는가. 단순하게 말하자면 조성이다. 익숙한 조성은 안심이 된다.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편안함은 곧 지루함이기도 하다. 편안함만 계속되는 것은 오히려 불편하다. 바로토크의 음악은 그런 의미에서 편안하다. 분명 불편하지만, 적당한 불편함. 너무 편안하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불편하지도 않고.

뜬금없이 떠오른 생각은 트로티농의 솔로를 들으며 구체적 형태를 갖춰 갔다. 트로티농의 발음으로는 '슈팡'에 가까운 쇼팽은 누구나 들어 보았다. 혹시 아니라도, 일단 들으면 꼭 들어본 것만 같다. 익숙한 멜로디가 시작되고 모두가 다음 멜로디를 기다리는 데 아주 짧은 멈춤, 그리고 이어지는 아주 약간의 불협화음.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익숙한 멜로디가 이어지고 다시 또 정적, 불편함, 그리고 또 편안함.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머리를 맞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그들을 비교할 수밖에 없다. 객석에 앉기 전 나는 타로를 편애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클래식과 재즈,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종합하면 그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트로티농이 더 좋았다.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앉아 차분하고 강인하게 건반을 두드리는, 4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청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타로보다, 거북목 현상이 어찌나 심한지 연주하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미스터 빈인 트로티농에게 반했다.

그는 건반을 두드리지 않는다. 대신 민다. 그리고 당긴다.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이마와 코끝과 어깨와 가슴과 배에서 뻗은 보이지 않는 줄이 피아노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탄다'는 말은 보통 현악기에 쓰지만 그의 피아노에는 이 표현이 어울린다. 누구에게나 특별히 반응하는 음의 배열, 그리고 리듬의 구성이 있다. 나는 밀었다 당겼다 엇박자들이 쏟아지면 열광하는데 트로티농의 연주가 딱 그랬다. 구태의연한 표현이지만 그는 피아노와 한몸이 되어 있었다.

앙코르인 스카를라티 소나타는 타로의 연주로 시작되었다. 트로티농은 건너편에 그냥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손을 건반에 올려놓는 것이다. 추임새를 넣는 것일까? 하지만 연주회장에 울리는 피아노 소리는 한 대 분량뿐이다. 오페라글래스의 초점을 트로티농의 손에 맞추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일단 내린 손을 잠시 후 다시 올렸다. 하지만 그 손은 건반에 가볍게 얹혀 있을 뿐 그의 피아노에는 여전히 아무 울림도 없다. 그러다 손을 모으더니 이번에는 팔을 쭉 펴 피아노 꼭대기에 올리고, 다시 무릎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건반으로. 고개도 까딱거리고, 소리 없이 입술만으로 흥얼거리기도 한다.

피아니스트의 손은 길기만 해서는 안 된다. 넓기도 해야 한다. 손등의 뼈가 선명하게 드러난 트로티농의 손은 자신의 차례가 되어서야 힘을 얻었다. 그는 활기차게 연주를 이어갔다. 타로가 혼자 치던 부분에서도 소리는 내지 않을지언정 그는 분명 연주하고 있었다. 그러지 못했다면 피아노를 '탈'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로의 손은 트로티농이 연주하는 동안 얌전히 무릎에 얹혀 있었다. 

.

내 손은 제법 넓다. 손등 뼈도 도드라졌지만 피아노는 치지 못한다. 이 손으로 잘 하는 일이 무언지 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일을 더 잘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잘하지 못해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반대로 지지리 못해도 꼭 하고 싶은 일도 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나는 나에 놀랄 것이다.

 


덧글

  • 마언니 2012/06/18 19:23 #

    저도 피아노 듀오곡은 보면서 엄청 놀랐던 기억이.....하나 윗 선배들이 했었는데....
  • 2012/06/19 16:47 #

    평소 무대 구석에 쳐박혀 있던 두 번째 피아노를 밀고 와서 세팅할 때부터 두근두근.
    그랜드 피아노 두 대가 동시에 최대 크기로 울리니까 박력이 대단했어요.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아직 기억날 정도.
  • 마언니 2012/06/18 19:24 #

    전 울 외삼촌 손을 보면서 손을 사용하는 사람의 손은 참 좋다..그리 생각하곤 합니다.
    가끔 손이 크고 두껍고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은 남자 손에 홀딱 반하곤해요.

    저 피아니스트의 손 같이 말예요.
  • 지혜 2012/06/18 19:43 #

    저두요!

    손은 정말 많은 걸 말해주는 것 같아요.
  • 2012/06/22 11:16 #

    마언니 /

    손이란 진짜 멋지죠.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0936747
    이 책 표지 보고 솔깃했는데
    좀 더 자세히 보니 음...
    그치만 발상은 좋다고 생각해요.
  • 2012/06/22 11:17 #

    지혜 /

    그러게요.
    고운 손 가진 사람 보면 부러운 마음이 크지만
    영락없는 노동자의 손인 제 손도 좋아요.
    ...라고 열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 puella 2012/06/18 20:11 #

    바르토크는 루마니아 포크 댄스 듣고 익숙해서 '아아 좋다' 싶었다가 푸른 수염 듣고 멘붕이 왔어요.
    역시 아직은 익숙한 게 좋은가봐요....
    그리고, 위에 마언니님도 말씀하셨듯 저도 '피아니스트의 손'에 홀딱 반하곤 합니다. 왠지 이 아래로도 남자의 손에 대한 신앙고백이 줄줄이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 2012/06/22 11:20 #

    여자들이 남자의 어떤 신체부위를 좋아하는지 남자들은 의외로 모르더라구요.
    팔뚝에 불끈불끈한 알통이나 두꺼운 가슴 따위, 좋아하는 여자가 전혀 없지야 않겠지만 ;;;;

  • 카이º 2012/06/18 21:30 #

    유전으로 타고난건지 저희 누나와 저는 손이 정말 길고 얇아서..
    어릴때부터 피아노 쳐라 라는 소리를 자주 들었어요~
    그래서 다니기도 했고.. 나름 오래 치고 그러기도 했는데..
    심지어 음감 좋다고 칭찬도 많이 들었긴 하지만..
    음악은 단지 즐기는 정도로만 그치게 되더라구요^^;

    그런데 요즘은 참 예술쪽의 취미에 눈이 가게 되더랍니다..
    심적으로 편해지는거 같기도 하구..
    저도 한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 2012/06/22 15:20 #

    전에 한 번 손 사진 올리시지 않았나요?
    정말 길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예술을 업으로 택하는 건 힘들어요 ㅠㅠ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천재 말고는 필요 없는 분야라서;;;
    하지만 취미로는 그보다 좋은 게 없죠!
    다시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 2012/06/19 02:5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6/22 15:24 #

    즐겁게 보셨다니 기쁩니다.
    그렇죠...비슷한 인간들은 비슷한 표인트를 봅니다 ㅋㅋㅋㅋ

    물론 더 있죠!
    이반 데니소비치라든가 다크타워라든가 미미여사의 시대물이라든가.
    안 그래도 편집자 만나서 의논하기로 했어요.
    하지만 비슷한 내용이 될 지 아니면 다른 책을 쓸지는 아직 모르겠스므니다.
    지금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휴가 따위 ㅠㅠㅠㅠㅠㅠ
  • 러움 2012/06/19 11:39 #

    마..마지막 사진 초콜렛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평생 식도락을.. 하다 털썩.
    어린 시절 여자아이들이라면 대부분 피아노를 한 번쯤 접하잖아요? 저는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ㅜ
    그래서 특히 남자들이 피아노치는 자태를 보면 헝허허허러허럴허헝헝.. 이런 마인드로 예술을 감상할 수 있을리가요.ㅠ 그래도 듣는것도 좋아하긴 해요. 좋아만;..헤헤..
  • 2012/06/22 20:27 #

    어..어떡해.... 초컬릿으로밖에 안 보여요.
    다진 헤이즐에 굴린 트뤼플 ㅠㅠㅠ
    책임지삼.

    클래식 음악팬 중 얼빠가 얼마나 많은 줄 알면 놀라실 거에요.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실력은 꽝인데 얼굴로만 부와 명예를 움켜쥐기, 이런 건 거의 없는데
    비슷비슷한 실력이면 얼굴 되는 사람이 승승장구하는 경우는 비일비재랄까.
    오페라처럼 비주얼이 중요한 장르도 아니고, 그냥 기악 연주자들까지 그렇더라구요
  • SvaraDeva 2012/06/20 01:52 #

    피아노 건반을 밀고 당기며 탄다라는 표현이 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는거죠?
    혹시 천재아니세요?
    오늘도 저는 프님께 무한한 팬심을 표하고 갑니다.
    저와 손이 똑같이 생긴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여 멋진 사람과 비슷해서 기뻐하며.

  • 2012/06/22 20:36 #

    왜.. 왜 이러세요.
    독일에서 심심하셨나봐요;;;

    이제 한국 오셨으니 재밌는 일 많으실 거에요
  • 나무늘보 2012/06/21 10:43 #

    저도 보고 싶어요! 아무것도 모르던 때는 프로니까 당연히 잘하는 거잖아. 했던 것들이 삶의 비루함과 사람의 한계라는 것을 알면서 그 잘함이 더욱더 빛나는 걸 깨달을 때는 정말 숨이 막히더라구요.
  • 2012/06/22 20:38 #

    담에 기회가 되면 같이 보러 가자.
    상상만으로는 자기 기호를 잘 몰라.
    직접 접하기 전까지는 장담 금물.
    또 그 기호란 게 이랬다 저랬다 하기도 하고-_-;;;
    최소한 나는 그렇다라고;;
  • 히카리 2012/06/21 17:40 #

    저 아름다운 손... 하아! 피아노를 쳐본적이 없어서 잘 치는 분들 보면
    아름답고 황홀하고 그럽니다. 저도 맨 마지막 사진 초콜릿인줄 알았어요.ㅠㅜ
  • 2012/06/22 20:38 #

    저도 초컬릿으로만 보여요 ㅠㅠㅠ

    피아니스트의 손을 흠모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가 봐요.
    저 사진이 앨범 재킷인데, 너무나 노리고 찍지 않았나요?
  • 2012/06/22 01:4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6/24 22:51 #

    즐겁게 읽으셨다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이런 저런 정보들은 이미 알고있었던 건 물론 아니고, 뒷조사-_-를 하도 좋아하도 보니;;;
    어렸을 때부터 그런 걸 좋아하다보니 제가 학자가 될 재목인 줄 알았다니까요.
    진상은 호사가였지만요;;;

    모자 추천은 아마 책 추천에서 연상된 것이겠죠?
  • 2012/06/22 09:37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6/24 22:53 #

    설마요.
    저는 소소한 걸로는 뒷일 안 꾸밉니다.
    한 100억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만^^;;;;;;
    (그런 건수 있으면 꼭 끼워 주세요)

    암튼 필요한 분께 가서 요긴하게 쓰이게 되었다니 만사형통인거죠 >_<
  • 2012/06/26 20:13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6/27 20:15 #

    얼굴은 사실 사진보다 못했지만;;;
    손만은 정말 멋졌어요.

    남자나 여자나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이 제일 멋있고,
    그 중에서도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이 제일 멋지다고 생각해요.
  • 2012/07/03 11:4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03 17:40 #

    블로그에 덧글 달았어요^^
  • 2012/07/04 01:10 #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2012/07/04 20:05 # 비공개

    비공개 답글입니다.
  • 삼별초 2012/07/07 13:39 #

    프님 또 잠수 타셨긔 ㅠ ㅠ
  • 2012/07/07 21:08 #

    앗 잠수 아닌데요
    ...라고 말하려고 했더니 3주나 지났군요.

    안 그래도 포스팅 하려고 했어요 조만간^^;;;
    근데 이 상황 전에도 한 번 있지 않았나;;;
  • 홍홍양 2012/07/08 03:25 #

    저도 새 글 기다려요. 프님^^
  • 2012/07/08 13:48 #

    저야 말로 홍홍양님 새 글을 얼마나 기다리는데요.
    레이몬드 카버가 블로그를 했다면 홍홍양님 같은 포스팅을 하지 않았을까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